太太郎人文學의 책을 기초로 연재

타로를 연구하는 전문 심리치료사 자연심리상담연구소 소장입니다.오늘부터 제가 쓴 타로본 이미 13쇄를 인쇄해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현재도 끊임없이 발간되는 #타로본 ‘타로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 이번 11월에 나온 2권 ‘타로 묻고 심리학이 답하다’를 연재하려고 합니다.저자 : 자연출판사 : 정아람 미디어 처음으로 이 글을 읽는 분들을 위해 이해를 돕기 위해서 아래 연재글은 타로인문학으로 시작합니다.타로에 처음 입문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타로심리학은 타로와는 상관없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타로강의는외부초청타로심리코칭강의와함께연구소에서는정기적으로열리고있습니다.참고로 1월 타로 심리코칭 기초과정, 1월 14, 21 양일간 진행됩니다.

들어가는 말과 다로의 만남도 산이 바뀌는 시간을 훨씬 넘었고, 나는 일 년에 천여 명에게 다로 교육을 하는데, 다로에 관한 책을 낸다는 것은 다로의 일면만을 그것도 글로 설명하기가 내키지 않아 주저해 왔다.타로 안에 내포된 묘하고 매력적이며 우리 삶의 지혜를 일깨우는 많은 가르침이 담겨 있지만 타로의 잘못된 사용과 편견을 조금이라도 바로 알리고 싶어 역시 대면 강의와 비교하면 절반밖에 표현할 수 없는 글이지만 동서양의 가벼운 인문학 접근으로 타로와 인문학을 바탕으로 이해를 돕고자 했다.내가 타로를 만난 지 벌써 십여 년의 세월이 흘러 일 년에 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타로를 가르치고 있는데, 타로에 관해 책을 낸다는 것이 자칫 타로의 일면만을 글로 설명하는 것 같아 주저해 왔다.

타로에 깃든 깊고 심오한 삶의 지혜를 어떻게 글로 다 풀어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지만 최근 널리 유행처럼 되어버린 타로에 대한 잘못된 일반의 인식을 조금이라도 바로잡아 알리고 싶어 책을 내기로 했다. 물론 타로를 제대로 접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담자와 상담자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강의와 상담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동서양의 인문학을 아우르는 방대한 타로의 세계를 부족하지만 소개해 이해를 돕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나의 망설임을 물리쳐 주었다.

자연심리상담소에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개인상담부터 타로상담을 배우러 먼 곳에서도 일부러 찾아온다.그런데 많은 분들이 타로 과정이 어느 정도에 이르면 타로가 잘 안 읽힌다며 조바심을 내긴 한다. 어렵다, 이해가 안 된다, 리딩이 안 되면 고민이 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타로의 역사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14세기부터 시작됐으며 그 지적 배경도 모로코 수피 카타르에서부터 아틀란티스 신비주의 랍비 유대교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종교와 역사, 철학을 담고 있다.카발리스트들의 지침서인 조하르는 1400쪽 분량의 걸작이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몇 번 짧은 수업을 통해 통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보면 다로(太太郎)는 우리의 삶과 연륜과 함께 천천히 그 비밀을 푼다고 봐야 할 것이다. 바탕인 이를 어떻게 그 짧은 몇 번의 타로 수업만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타로를 Arcana 신비라고 부른다.

나는 타로에 관심이 있는 사람, 조금이라도 타로에 대해 제대로 이해해 주길 바라는 사람들을 위해 아직도 이 글을 준비하게 되었다.이 책은 타로의 상징을 키워드를 통해 재미있고 쉽게 외우기 쉽도록 구성했다. 다로(太太郎)는 지식이 아니다. 학문도 아니다.타로는 발견이자 깨달음이기 때문에 수많은 상징을 통한 사색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글은 어쩌면 그 사색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용히 마음을 비우면 오히려 타로카드의 상징이 하나둘 자연스러워 보이기 시작하고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그것을 통해 자신과의 만남, 자신의 내면을 보는 것, 고통의 원인을 아는 것, 방향성을 정하는 삶이 편해지는 등이 가능해질 것이다.하나의 종교도 어느 날 갑자기 믿음이 자라지 않는다. 수행의 과정이 있고, 깨달음의 과정이 있으며, 그것들을 만들어가는 것은 바로 자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로는 명사로 표현할 수 없듯이 단어에 얽매이는 것은 다로의 해석을 방해하는 요소인 만큼 머리의 것을 가슴에 내려놓는 연습과 함께 다로가 더 큰 세계로 나아가는 통로인 것처럼 이 글이 다로에게 가는, 자신과 만나기 쉽고 재미있는 ‘통로’가 되기를 희망한다.

다로는 명사로 표현할 수 없듯이 단어에 얽매이는 것은 다로의 해석을 방해하는 요소인 만큼 머리의 것을 가슴에 내려놓는 연습과 함께 다로가 더 큰 세계로 나아가는 통로인 것처럼 이 글이 다로에게 가는, 자신과 만나기 쉽고 재미있는 ‘통로’가 되기를 희망한다.